‘설마’했던 그곳으로 간다

‘설마’했던 그곳으로 간다
– 치악산 비로봉 (황골-비로봉-구룡사)

설마.

멀리 보이는 비로봉을 보며 자동반사적으로 탄식이 터져나온다. 깔딱고개를 겨우 넘어왔더니 여기가 끝이 아니라 저 봉우리란다. 게다가 어떻게 올라온 길인데 내리막이 눈앞이다. 내려갔다가 가파르게 오르는 길이다. 자연이 낸 길이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건 당연지사지만, 괜히 야속하다.

처음은 아니다. 북한산에서도, 수락산에서도 그랬다. 정신이 없어 위를 보지 못하는 경우나 중턱부터 시작해 봉우리가 잘 보이지 않았던 몇 번을 제하고는 ‘에이 설마, 저기까지 올라가겠어’라고 생각했던 그곳까지 올라가야 했다.

정상이나 목표지점에 반드시 올라야 한다는 법도 없고, 억지로 시킨 사람도 없었다. 아득한 그곳을 바라보며, 30분 거리라고 표시해둔 안내판을 보며 ‘거짓말’이라고 중얼거리며, 악으로 깡으로 한걸음씩 내딛다 보면 어느 순간 그곳에 발이 닿는다. ‘설마’했던 그곳을 밟는 순간의 쾌감은 짧지만 명쾌하다. 그간 나는 인간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산에서의 성취감은 정직하고 가시적이다. 몸을 쓴 만큼 어딘가로 향하고 당도한다. 들머리라 불리는 산행의 시작점이 있으면, 날머리인 끝지점이 있다. 대피소에서 1박을 하든, 비박을 하든 산행 중 돌연 마음을 먹고 집을 짓고 살지 않는 이상 시작과 끝이 분명하다.

오르고 내릴 때 발이 땅에 온전히 닿을 수 있게 온 신경을 기울인다. 땀이 나고 식거나 에너지가 떨어진다는 몸의 신호에 맞춰 옷을 벗고 입거나 간식과 물을 취한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을 때 잠깐 쉬면 또 나아갈 힘이 생긴다. 산을 드리운 햇살의 색을 보며 노란 빛이 짙은 ‘지는 해’가 시작되기 전에 하산길에 나선다. 온몸을 움직이며 그저 안전하게 살아 돌아갈 수 있도록 본능적인 감각에만 집중한다.

일상이 복잡하게 얽혀 가슴을 조여올 때 산을 향하는 마음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시작과 끝이 있고, 눈과 수풀, 돌 사이를 헤치며 디딘 만큼 나아가는 곳, 산에서 어느새 일과 관계, 혹은 다른 것에 빼앗겼던 주위가 오롯이 나를 향한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할 수 있다는 마음을 얻어간다. 그 마음이 소진되어 돌아와 다시 채워가기를 반복한다. 눈이 좋아 시작한 짧은 여행이 산을 향하고, 무거운 카메라를 이고 진 몇 시간의 출사가 1g의 전쟁에 돌입한 산행이 되어간다. 우산장수와 소금장수 아들을 둔 어머니마냥 비를 좋아하면서도 주말만은 맑은 날씨를 기다리게 되었다. 며칠을 근육통으로 고생하고 다시는 안 가겠다고 씩씩대다 이내 등산 코스를 검색하는 아이러니는 대부분 몸의 의지에 이끌렸다.

뒤쳐진 봄이 속도를 내는 치악산의 앙상한 나뭇가지가 엉성하게 하늘을 가린다. 발걸음이 닿는 땅에서 열기가 올라온다. 해를 피할 곳이 없어 찡그리며 둘러보다 손톱만큼 보이는 비로봉에 만감이 교차했다. 산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경험하면 된다. 그렇게 천천히 다독이며 멈추지 않은 발걸음은 마침내 비로봉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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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기: 2018년 4월
  
• 들머리: 황골탐방지원센터
  
• 날머리: 구룡탐방지원센터
  
• 코스: 황골탐방지원센터 – 입석사 – 쥐너미재전망대 – 비로봉 – 계곡길 – 구룡사 – 구룡탐방지원센터
  
• 총 이동거리: 약 9.1 km
  
• 총 소요시간: 7시간 40분 (사진 찍고 쉬고 먹은 시간 모두 포함. 움직인 시간은 총 6시간 30분)
  
• 유랑 노트는 여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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