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점 JIRI
전통주점 <JIRI>
–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
크고 깊은 지리산은 언제나 그립고 소중한 곳이라, 그 이름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발걸음을 멈추거나 알지도 못하는 무언가를 시켜보기도 한다. 산행도 고사하고 쉬던 주말, 이름이 그러하여 넌지시 권하는 데 마다할 재간이 없다.
올 여름에 연 이곳은 지리산 인근의 식재료를 활용한다는 데서 <지리>라는 이름을 걸었다. 12명 정도 앉을 수 있는 규모로, 매일 1,2부에는 맡김차림으로 3부에는 단품으로 구성된다. 민속주점인만큼 주류 주문은 필수라고.
막걸리는 그저 누가 주는 걸 한 두 잔 마시는 정도라 오늘의 막걸리를 주문한다. 테이블은 바 형태로 되어 있어 담당 요리사나 직원이 앞에 앉은 손님을 마주할 줄 알았는데, 주방을 둘러 앉은 형태라 한 코스가 나가고 나면 다음 요리를 준비하기 바쁘다. 요리와 술이 나올 때 간단하게 설명을 곁들여준다.
경상남도, 전라남북도에 걸친 큰 산 답게 식재료의 출신도 다양하다. 흑돼지 중에서도 버크셔K는 남원에서 미국계 버크셔 품종을 들여와 육종을 거듭, 국제식량기구(FAO)에 ‘다산 버크셔’로 등재된 품종이다.
우리가 흔히 먹는 돼지의 대체로 요크셔(Y), 랜드레이스(L), 두록(D) 등 외국 도입종의 특징을 살려 교배한 몸이 하얀 ‘삼원교배종’으로 성장이 빠르고 고기 생산량이 많다. 반면, 흑돼지는 맛과 식감이 뛰어나지만 성장 속도가 느리고 가격이 비싼 편. 육백이라고도 불리는 버크셔K는 특히 비계의 수분 함량이 적고 고기는 탄력과 부드러움을 지니면서 감칠맛이 나며, 최근 버크셔K를 내세운 식당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지리>의 차림음식에는 버크셔K로 만든 육전과 LA갈비가 포함되어 있다.
돼지의 많은 부위는 삼겹살부터 등뼈, 내장까지 우리네 먹거리로 두루 쓰이지만 지방함량이 낮은 부위는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다. 저지방 부위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뒷다리는 우리나라에서는 비인기 부위이지만, 외국에서는 통구이나 스테이크로 먹기도 하고 가공육으로 활용된다. 스페인 하몽이나 이탈리아 프로슈토, 중국 진화화퇴 등은 돼지 뒷다리를 염지, 건조, 발효시켜 만든 숙성/발효생햄이다. 남원에서는 흑돼지로 만든 하몽을 비롯해 다양한 발효 가공육을 만들고 있다. 맡김차림 두 번째 음식인 샐러드에 버크셔K로 만든 하몽이 함께 나온다.
맡김차림은 남원에서 만든 김부각과 흑돼지를 갈아 만든 빠떼*, 미나리 장아찌를 담은 전채요리, 복분자오일을 뿌린 하몽샐러드와 지리산 자색고구마와 씀바귀오일을 올린 스프, 고사리, 방풍나물, 깻잎, 뽕잎으로 만든 산나물전, 돼지안심 육전과 파김치, 명이나물, 참나물과 LA갈비, 수연소면**으로 만든 재첩국수, 디저트인 후숙멜론과 샤인머스켓으로 구성되어 있다. 메뉴가 바뀌는 주기는 따로 없고 가게를 연 이후로 재료에 따라 메뉴를 조금씩 바꿔왔다고 한다. 방문한 날도 차림표와 실제 나오는 구성은 조금씩 달랐는데, 계절에 따라 바뀌는 식재료를 활용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빠떼(Pâté)는 'paste(반죽 혹은 빵에 발라먹거나 요리를 하기 위해 고기, 생선 등을 으깨어 반죽같이 만든 것)'이라는 의미의 프랑스 음식으로, 전통적으로는 파이 크러스트에 올려 나오거나(Pâté en croûte) 테린 속에 채워 먹었다고 한다. 근래에는 고기, 야채, 간, 해산물 등 재료를 섞어 간 음식을 의미하며, 꼬냑이나 브랜디 향을 더하기도 한다. 산초향이 나는 <지리>의 흑돼지 빠떼는 함께 나온 김부각에 발라먹거나 그냥 먹어도 무방했다.
**수연(手延) 소면은 손으로 반죽을 늘린 소면이라는 뜻으로, 반죽을 늘리고 숙성하는 과정을 반복해 만든다. 수연소면은 면발의 탄력이 뛰어나고 잘 퍼지지 않는다.
오늘의 막걸리는 입맛을 돋우는 새큼한 막걸리 경기 양주도가 ‘별산’, 높은 도수의 깔끔한 맛으로 메인 요리들과 어울리는 서울 C레드의 ‘C레드막걸리’, 우유처럼 하얀 베일리 느낌의 포천일동막걸리 ‘담은’으로, 음식과 조합이 좋았다. 추가로 주문한 함양 지리산 옛술도가 ‘꽃잠’은 시원하게 사발에 따라 마셔야 제맛이고 그 중 세 번째 잔이 가장 맛있다고 한다. 시원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얼음을 채운 아이스백에 담아준다. 원하면 사발도 준비해준다.
맡김차림에 길 건너 위치한 최강금 돈까스로 만든 최강금토스트를 추가할 수 있다. 맡김차림의 양도 적지는 않았지만 겸사 맛보자는 생각해 주문했다. 브리오슈 토스트 사이로 두꺼운 돈까스, 모짜렐라치즈가 들어있고, 돈까스 소스와 오디잼이 함께 나온다. 손으로 들고 베어먹는 것이 좋다며 물수건도 내어준다.
산으로 접한 지리산이라 지리산의 맑은 물과 공기를 머금은 채소나 과일을 활용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물과 고기, 한식과 서양식의 응용이라 매 차림마다 호기심 있게 맛볼 수 있었다. 평소에 심심하게 먹는 편이라 전반적으로 간이 된 느낌이지만 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2시간 간격으로 시간이 배정되어 있어 먹으면서 마음이 좀 급해지고, 2부나 3부 예약이라면 정리가 끝날 때까지 대기할 수도 있다. 식사 공간과 마주한 앞쪽 주방에서 전을 구워내기 때문에 나올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름 냄새가 밴다는 것도 다소 아쉬운 점. 음식을 조리하는 과정을 보여주거나 음식을 내어주며 손님과 대화를 할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주방을 앞으로 낼 필요가 있었나 싶다.
육전이나 LA 갈비, 국수 등 아주 새로운 음식은 아니지만, 조합을 달리하니 새롭다. 큼직한 전을 두고 사발에 마실 때는 그 맛이 특별하지 않았는데, 음식과 어울리는 막걸리를 곁들이니 와인만큼이나 풍미를 더한다. 가까이 있어 익숙해진 많은 것들은 우연한 계기로 낯설고 새롭게 시선을 끈다.
멀리 가지 않아도 가보지 않은 여러 나라의 요리가 우리땅에서 난 식재료와 만나 만들어 낸 새로운 맛을 경험할 수 있는 시대와 도시에, 나는 살고 있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든, 아주 오랜만의 외식이었다.
지리(JIRI)
– 위치: 서울 마포구 월드컵로3길 31-5 2층 (합정역 8번 출구에서 288m)
– 전통, 민속주점으로 1,2부는 맡김차림, 3부는 단품. 네이버예약으로 예약
– 2020년 11월 방문
참고자료
– 농사로 | 발효생햄
– 중앙일보 | 탱글탱글 감칠맛 남원 흑돼지 … 110년 전 미국서 왔대요 (2015/11/02)
– 한국경제 | 豚의 재발견, 삼겹살·목살 먹을까?…이베리코·버크셔K 어때? (2020/10/22)
– 주간동아 | 지리산에서 한국산 하몽을 맛보다 (2019/08/26)
– The Spruce Eats | What Is Pâté? (2019/05/28)
– The Spruce Eats | What Is Terrine and Where Does It Come From? (201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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