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유럽

(2015) 오늘 뭐 먹지? in 영국

영국 음식하면 으레 ‘피쉬 앤 칩스’를 떠올린다. 얼마나 먹을 게 없으면 한 나라의 대표 음식이 생선 튀김이겠냐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150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음식이다.

여행 전 지인들의 말을 종합해본 결과, 영국에서는 ‘피쉬 앤 칩스’ 외에는 특별히 먹을 게 없다는 것이 통설인 듯했다. 영국 음식에 대한 편견은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이웃나라 프랑스에도 있었다. 역사적으로 앙숙인 두 나라 사이에 오간 험담이야 차고 넘치지만, 10여 년 전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이 “핀란드 음식 다음으로 영국 음식이 가장 형편 없다”는 비극적인 발언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닐 터. 영국은 볼 것도 먹을 것도 마땅치 않다는 주변의 반응은 기대치를 한껏 낮췄다. 위의 용량이 아쉬워 속상한 상황은 없겠다 싶었다.

먹거리에 대한 기대가 전무했던 첫 3일은 거의 바게트 샌드위치만 질겅거렸다. 영국의 서브웨이 격인 ‘Pret a Manger(프레타망제)’는 고급스러운 편. 기차역의 이름 모를 샌드위치며 버거킹까지 패스트푸드로 대강 끼니를 때우면서도 ‘여긴 먹을 게 없다’며 자견했다.
패스트푸드라고 해서 싼 것도 아니다. 버거킹 치킨버거 세트가 6.39 파운드, 지금 환율로 11,000원 정도 (1 GBP = 1,734.58)

춥고 배고프고 서러움이 극에 달했던 에딘버러의 스테이크에 눈이 번쩍 뜨였다. 21일 동안 나를 기다리며 바싹 숙성된 스테이크가 입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맙소사, 를 연발하며 마파람에 감춘 게 눈보다 더 빠른 속도로 스테이크와 맥주를 비웠다.

알고 보니 영국은, 혹은 영국도, 먹을 것이 지천에 널린 곳이었다. 순대가 익숙한 우리에게는 가까우면서도 먼 해기스나 블랙 푸딩과 같은 지역별 전통 음식도 있고, 세계적인 대도시답게 런던에서는 다양한 문화권의 산해진미를 맛볼 수 있다.

레스토랑이 아닌, 맥주만 마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펍(Pub)에서도 꽤 괜찮은 음식으로 한 끼 든든히 배를 채울 수 있다. 에딘버러의 스테이크도 ‘The Last Drop’이라는 가스트로펍의 작품(!). 골목골목 크고 작은 펍들에서 로마인의 브리튼 섬 정복, 그러니까 약 2000년 전 시작된 영국 펍과 맥주의 전통을 맛볼 수 있다. 미로보다 더 찾기 힘들었던 어느 조그만 펍의 한 면을 각양각색 맥주 탭이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어째서 맥주를 생각하지 못했던가! 두고두고 땅을 칠 일이다.

뒤늦게 부지런히 먹고 마셨다.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음식에 더 신기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푸드 마켓에서는 비장한 마음으로 맥주며 과일, 파이 등을 봉투에 가득 담았다. 그 와중에 길거리 음식의 유혹에 빠지지 않겠다고 배를 채우고 간 미련함이란. 맛만 보고 음식을 뱉어낸 고대 로마 귀족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튀니지 혹은 이스라엘 아침식사라는 ‘샤크슈카(Shakshouka)’.
진한 토마토 소스에 반숙 계란과 야채가 들어있는데, 아침으로 먹기에는 자극적. 비교할 만한 맛의 경험이 없어 당황했던 음식이다.

편견은 많은 것으로부터 눈과 귀를 가리고, 좁게 보이는 길만 내달리는 경주마처럼 지금 아는 만큼, 딱 거기까지의 세상을 보여준다. 영국 음식에 대한 고루한 편견을 버리는 순간, 세계 각국의 음식이 보였다. 대동소이할 것이라 생각했던 커피의 맛과 향도 달랐다. 편견에 갇혀 10시간 넘게 날아간 타지에서 동네 앞마당을 거니는 것보다 못한 경험을 할 뻔했다는 생각에 아찔하기까지 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리에 가까운 이 명제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비운 만큼 채워진다’는 것. 지금 알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세상에 과감하게 스스로를 던질 때, 스쳐 지나간 낯선 풍경과 사람, 경험이 온전히 내 안에 쌓이고, 차곡히 쌓아 올린 기억은 언젠가 나를 지탱하는 힘으로 돌아온다. 여행의 경험이란 그런 것이다.

여행담의 초반에 자꾸 먹는 것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쉬움이 크기 때문이지 싶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영국으로 식도락 여행을 떠나겠다고 슬며시 결심해본다. 영화 <더 월즈 엔드(The World’s End)> 같은 펍 투어도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다.


The World’s End라는 이름의 펍도 있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갔지만 너무 늦어 결국 되돌아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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