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Journey Log

거짓말처럼 괜찮았던 하루를 보내며

십 수년을 거슬러 올라간 오늘의 기억에는 웃음이 넘친다. 교복을 입은 나와 친구들은 다른 교실에 태연하게 앉아 있기도 했고, 강의실을 향하는 서로에게 무슨 수업이 휴강이라며 진지한 얼굴로 농을 건넸다. 꾀를 쓴 이도, 꾀에 빠진 이도 배를 잡고 웃었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꺼냈다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오늘의 핑계를 대기도 했다. 그도 그녀도 겸연쩍게 웃었을 거다. 4월 1일. 무심결에 달력을 넘기다 한 달의 첫 날이고, 첫 주의 시작인 그저 그런 날의 새삼스런 기억들이 떠오른다.

우울도 기쁨도 삶의 일부라지만, 나도 모르게 덩치를 키워온 그 무게에 짓눌릴 때가 있다. 2주 전이 그랬다. 쫓고 쫓는 메일이 쉴 틈 없이 들어오고, 책임을 전가하는 말이 하나 둘 쌓여가는 그저 그런 월요일이었다. 모니터 앞에서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홀로 가라앉고 있었다.

감정도, 생각도 극단을 향했다. 우울감이 깊고 무겁게 드리운 게 처음은 아니었다. 나의 우울은 늘 깊은 곳에 모습을 숨긴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침몰하는 나의 배에 탄 여러 자아 중 하나가 겨우 힘을 내 자판을 두드렸다. 정신과, 상담, 우울증…

“근데 이러다 후회하는 거 아녀?”

“더 무리하면 너는 죽쏘….”

종종 보곤 했던 웹툰 한 컷에 마음 속에서 쿵 소리가 났다. 몸이 아플 땐 약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원인만 파악하지 무슨 음식을 어떻게 먹어서 탈이 났고, 그 음식은 누가 줬고, 그랬으면 됐니 안됐니를 따지지 않는다. 마음이 아플 때는 그렇지 못했다. 왜 아프고, 누가 아프게 했고, 나는 왜 아플 수 밖에 없는지를 따졌다. 따지고 묻는 과정의 끝에는 자책이었다. 나의 상처를 더 깊숙이 찌르고 헤집은 건 다름아닌 나였다.

경쟁 사회의 적당한 자리에서 생존하기 위해 어느샌가 쉬는 시간마저 효율과 아웃풋을 계산하고 있었다. 빈 시간을 무언가로 채워야 하고, 보고 듣고 나면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는 강박이 들어섰다. 목표를 세우고 기록하며 수치화했다. 좋아서 시작한 것들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간을 한 톨 한 톨 ‘생산적’으로 쓴 건 아니다. 멍하게 있기도 하고, TV 앞에 한없이 늘어져 있기도 하고, 충동적으로 쏘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보낸 시간들에 무엇을 남겼느냐고 되물으며 크고 작은 자책이 쌓여갔다.

 

“근데 왜 그렇게 높은 산을 다니는거야?”

친구가 물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받을 정도를 두고 고도를 정하는데 최근에는 지리산, 설악산만 가게 되더라, 너스레를 떨며 답하곤 했다. 진심이기도 했다. 같은 질문에 대한 그 날 나의 대답은 ‘불안해서’였다.

삭막하고 거친 업무 환경 자체도 문제였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쏟아지는 비난에 나는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열과 성을 다해도, 실수할까 노심초사해도 늘 꼬투리가 잡혔다. 10년 넘게 비슷하고 다른 일을 하면서 스스로에 당당하려 노력해온 시간이 불과 1,2년 사이에 모두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남의 돈을 받는 일이 쉽기야 하겠냐마는,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연이어 몇 주를 주말마다 10시간씩 걷고도 혹 한 주라도 쉬면 다시 그렇게 못 걸을 것 같았다. 지리산 주능선을, 설악산 공룡능선을 넘고도 운이 좋은 것이었다고 치부해버렸다. 힘겹게 이루어 놓은, 그것마저 잃을까 두려웠다. 두려움은 강박으로 이어졌다.

 

나에게, 내 마음에 1달간 휴가를 주기로 했다

호기롭게 당장 밥벌이를 관둘 수 없는 생계형 직장인이라 내일도 출근한다는 사실이 당분간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 외의 시간에 무얼 해야 한다는 생각을, 쉬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기로 했다. 빼곡히 저장된 일정과 리스트를 정지하거나 미뤘다.

아무 계획 없이 하루 휴가를 냈다. 아침 해를 보러 갈까, 새벽 버스에 몸을 싣고 봄눈을 보러 갈까, 알람 소리에 뒤척이다 이불 속으로 알람을 집어넣었다. 해가 중천에 뜰때까지 이불 속에서 실눈을 뜨고 TV를 지켜봤다. 몸이 늘어지는 기분이 들어 오후에 잠깐 가까운 산에 다녀왔다. 산중에서 김훈 작가의 신간 소식을 접하고 벅찬 마음을 안고 서점으로 달려갔다. 돌아오는 길의 일몰은 근사했다. 땀을 씻고 난 후 핫초코와 새 책을 앞에 두니 웃음이 나왔다. 무언가에 설레어본 것도, 즐거운 마음에 피식 웃음이 나왔던 것도 참 오랜만이다.

삶의 어떤 선택에도 정답은 없겠지만, 모두의 인생은 각자의 답을 찾아 나가는 여정이라 믿는다. 사람과 사물, 자연과 시간과의 관계 속에 결국은 나를 향한 일상의 여정을 마음 가는 대로 기록해두고 싶어졌다. 거짓말 같이 괜찮았던 2019년 4월 1일이라면 그 시작이 꽤 괜찮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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