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유럽

(2015) 아, 영국, 그 날씨라는 녀석

감기계의 얼리어답터답게 환절기면 늘 콧물과 기침이다. 아마도 축약된 온도 정보를 옷차림으로 해석해내는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예컨대 ‘오늘은 영상 25도 안팎’이라는 기상 예보에 외투를 들었다 놓고 나가서 호되게 추위에 떨다 오거나, 도톰한 옷을 입고 갔다 땀을 질척하게 흘린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그렇다. 이런 나에게 경험하지 않은 타국의 날씨를 상상해서 입을 옷을 챙긴다는 것은 화성에서 감자를 키우는 일만큼 아득하고 어려운 일이다. 어느 시점에선가 ‘사람이 사는 곳이니 있을 건 다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빼먹은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현지 조달이라는 (아마도 신용) 카드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 카드는 영국 물가 앞에서는 쏙, 들어갔다.

호기로운 영국 여행의 크나큰 장애물은 날씨였다. 가뜩이나 예측 능력이 부족한 나에게 하루의 날씨를 가늠할 수 없는 영국은 시험의 땅이었다. 아침에는 비가 주룩주룩 오더니, 점심엔 해가 뜨며 덥고, 오후엔 바람이 불다 저녁엔 갑자기 쌀쌀해진다. 5월의 영국이 그랬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꾸준히 흐렸던, 급기야 35일간 해 한 번 뜨지 않았던, 시애틀의 어느 우울했던 겨울은 일관성이라도 있어 대처가 가능한 편이었다.  몹시 친절했던 호텔지배인은 이 몽매한 여행객에 현자 미소를 띄며 명언을 남겼다. “영국에서는 하루에 사계절을 경험할 수 있답니다

커피가 커피를 찾는 날은 시애틀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였는데, 이 곳도 마찬가지

날씨의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몰라 속수무책으로 휩쓸려 가고 있던 중, 에딘버러에서 그 정점에 다다른다. 침대칸의 로망으로 에딘버러로 가는 야간 열차를 (2번 생각하지 않고) 쾌재를 부르며 티켓을 끊어버린 것이 화근. 야간 열차의 충격, 경악, 공포 3단 콤보에 밤새 시달리다 아침 7시에 당도한 영국 스코틀랜드의 중심 에딘버러에는 얼음장 같은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중세풍의 도시라고 하면 보통 영화나 동화 속 그림 같은 풍경 아니었던가? 그래, 그림은 그림인데 드라큘라의 느낌이다. 스산하고 춥고 배고팠다. 에딘버러 성이 영업을 시작할 무렵, 해가 뜨기 시작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양 뺨을 후려 갈기는 듯한 칼바람이 불었다. 낮엔 덥더니 해가 질 무렵엔 다시 먹구름. 시차적응 실패와 계속된 영양 부족 상태로 결국 칼튼 힐 정상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바게트만 먹다 보니 사람이 이렇게 거칠어지나 싶어 스테이크 한 덩이를 우걱우걱 해치웠다.

다음 날 날씨도 고약했다. 춥고 비바람이 몰아쳤고 입김이 나왔다. 그러나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마음은 쏟아지는 비에 오히려 평온을 얻었다. 한국에서 손아귀에 많은 것을 쥐려 아등바등했던 나는 그제서야 자연 앞에 겸허해졌다. 사실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대자연을 마주한 나약한 인간의 생존은, 한국에서 쓰던 ‘생존’이라는 단어와는 차원이 달랐다. 간과하고 있는 많은 것들, 가령 제 때 밥을 먹는다든가, 추위에 옷을 껴입는다든가, 비바람에 몸을 피한다는 것이 집을 떠난 이 곳에서는  당연하지 않았다. 그 동안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에 감사하지 못하고, 생존이라는 미명하에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끝없는 욕심을 부린 것 같았다. 행복이란 사실 멀리 있는 게 아닌데. 쉴새 없이 달려오기만 한 것이 스스로는 물론 주변을, 가까운 사람들을 힘들게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해진다. 킬리만자로도 정복할 기세로 밀어붙인 여정에 자연이라는 변수를 계산하지 못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신의 한 수 중 하이라이트였던 것 같다.

그렇게 여행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절반이 지나고 나서야 홀로 떠나온 여행이 즐거워졌다. 아니, 절반 밖에 지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지. 퀼트를 두른 수염 덥수룩한 가이드가 올라타 “There’s no such thing as bad weather, just wrong jacket (나쁜 날씨라는 건 없습니다. 재킷을 잘못 가져 나온 것이겠죠)“랜다. 잘 가져 나왔으면 어떻고 또 잘못 가져 나왔으면 어떠랴. 입을 게 있다는 게 장땡이지!

+ 에딘버러에서의 하루

  • 이른 아침 – Edinburgh Waverley 역 근처 & 에딘버러 성(Edinburgh Castle) 입구

  • 늦은 아침 – 에딘버러 성에서 본 도시 전경

  • 이른 오후 – The Meadows 

  • 늦은 오후 – 칼튼 힐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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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랑 · A Wild 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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