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유럽

(2015) ‘영국 영어’의 편견이 무너지고 자유를 얻다

“Pa..Pa..Pardon?”

입국 심사대의 히잡을 두른 여성은 말을 하는 것보다 내뱉는 수준이었다. 그는 시선도 마주치지 않은 채 의례적인 질문을 던졌다. 새벽 이슬을 맞으며 도착한 비행기에 정신을 두고 내린 걸까. 무심하게 질문이 던져지는 와중에도 멍해졌다. 짜증 섞인 목소리에 그제서야 주섬주섬 여행을 왔노라고 대답했다.

신사의 나라에 대한 무한한 환상이 만들어낸 부작용일까. 입국 심사대의 불친절이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퉁명스러움에 괜히 마음이 작아졌다. ‘내가 못 알아들어서 아니라, 목소리가 작아서 못 들은 거라고!’ 외쳐주고 싶지만, 낯선 타지에서 하소연할 곳이 없다. 어머니가 아셨다면, 또 쓸데없는데 자존심을 세운다고 하셨겠지. 도착한지 1시간도 채 넘기지 않아 집 생각이다.

‘영국’하면 자동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영국 영어’. 같은 영어라도 뭐랄까, ‘영국 영어’라면 곱게 다림질해 선이 잘 잡혀 있는 제복이 연상됐다. 그 본고장에 왔으니, 먹는 입은 몰라도, 말하는 입과 듣는 귀는 즐거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영국 영어를 쓰는 친구 한 명 사귀고 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는 자꾸 부풀어갔다.

세계 여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런던 사람들은 무척 분주했다. 타인의 영역을 존중하고 가볍게 눈길을 흘리지 않는다.  동행이 있든, 혼자 왔든 서로 개의치 않았다. 카페에 앉아 우아하게 커피 한 잔, 혹은 펍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 들이키며 옆 사람에 ‘안녕, 난 한국에서 왔어’라며 가벼운 대화를 시도하려던 계획은 그렇게 무산됐다.


영국 첫 현지식 @ Pret A Manger (눈물나는 바게트 여행의 시작)

길을 물을 때는 다들 천사였는데, 필요한 친절 이상의 관심은 절제하는 것 같았다. 존중 받는 느낌이 들면서도 사람과의 대화가 그리웠다. 영국 영어는 둘째치고 말이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새라면 기겁하지만 닭만한 런던의 비둘기라도 잡고 수다를 떨고 싶었다. 아는 길도 모르는 척 물었지만 호텔 지배인은 참 친절했더랬다.

골목이 얼기설기 얽혀있는 런던 도심에서는 위대한 구글맵도 방향을 잃었다. 안 마셔본 사람은 있어도 한 잔만 마셔본 적은 없을 거라는 ‘맘모스 커피’를 찾다 지쳐 들어간 카페에서 마주한 큰 타르트처럼 생긴 음식을 두고 물었다. 스페인 어로 추정되는 억양이 섞인 말로 점원은 정체 모를 음식을 설명해주려 노력했다. 안타깝게도 평생 들어본 적 없는 단어니 나에겐 신기한 소리일 뿐.

110915_1458_20153.jpg음식은 바로 Savory Pie 중 하나인 Quiche (키쉬)
(Savory에 대한 의견이 분분. 단 것(Sweet)과는 반대 개념으로 쓰기도 하고, 고기류(Meat)를 채운 것을 말하기도 한다고) *궁금증을 풀어주신 지인 분께 심심한 감사

9일 남짓 여행하며 내가 기대했던 ‘영국식 영어’를 들을 기회는 몇 번 없었다. 인도, 스페인, 프랑스 등 그들 영어에는 각자의 뿌리가 섞여 있었고, 일관된 ‘영국식 영어’의 억양과 어투를 구사하려 애쓰지 않았다. 누구나 자신의 뿌리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말했다. 덕분에 어투가 다른 낯선 이방인에 대한 불편한 시선과 호기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10년 전 미국에서 카라멜 마끼아토를 시키려다 카페 라떼만 (과장 조금 보태) 10잔 넘게 마셨다. 우물쭈물한 나의 주문에 “What?”이라고 되물을 때마다 주눅이 들었던 까닭이다. 그 당시엔 발음이 까다로운 커피를 좋아한 내 탓이려니 했다. 이후 근 10년간 어떤 언어를 배우든 현지 사람의 억양과 어투에 가장 가깝게 말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그 카페에서 오랜 강박이, 족쇄가 탁, 하고 풀린 느낌이었다. 누가 어떤 발음으로 이야기를 하든 그 자체로 존중 받았다(타인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이겠지만). 다양한 인종과 문화, 역사가 오가고 공존하는 이 곳에서는 개개인이 온전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무심함에서 차가움이 아닌 배려가 느껴졌다.

어딜 가도 (영어로) 주눅 들지 말자. 어깨 펴고 당당하게 카↗라↘멜↘마↘끼↘아↗토↘‘를 주문하자. “What?”이라고 쏘아 붙이듯 되물어도 다시 쏴줄테다. 내가 영어를 쓰지 한국말을 하냐고. 호기로움에 자신감까지 더했으니 용감무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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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랑 · A Wild 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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