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걷고 오르고한국

눈 덮인 오대산, 설산 초행기

지난한 한 해가 지날 무렵, 추위에 약하지만 눈을 좋아하는 두 얼굴의 마음이 설경을 향한 욕망을 부추겼다. 눈 쌓인 산. 막연히 강원도를, 어린 시절 흐릿한 기억에 한 두어 번 갔던 스키장 주변의 오대산을 생각해냈다.

홀로 산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혼자라는 유난에 편승하고 싶지는 않다. 정확히는 혼술, 혼밥, 혼산, 행위 자체가 아니라 관계 속의 행위를, 다소 자기연민적인 시선으로 관심을 바라는 단어의 생성과 확산이 싫다. 걷고 달리고 오르내리고, 카메라에 무언가를 담는 행위는 나에게는 좀 더 사적인 행위인데다, 이것저것에 셔터를 누르는 더딘 속도와 유약한 체력으로 타인의 발걸음을 늦추거나 마음이 쫓기기도 싫었다.

새벽 기차에 몸을 싣고 이제야 붉어지는 하늘은 본다. 옆자리에서는 의자를 돌려 마주본 가족의 수다가 한창이다. 어머니 또래의 딸들과 그들과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아버지. 산을 좋아하셨지만 추위에 약하셨던 아버지라면 설산에 오르셨을까. 그때는 뒷산을 오르자는 권유에 손사래 치던 나는 지금 홀로 산으로 향한다.

경강선이 오가는 청량리역

“어디까지 가세요?”

버스를 기다리는 역에서 한 중년 여성이 말을 걸어온다. 타국에서는 줄곧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을 피해 나만의 시간으로 파고들곤 해 사뭇 낯선 경험이다. 목적지는 같고, 목적은 달랐다.

8년 전 교통사고의 트라우마로 몇 번을 병원에 입원했다. 홀로 가는 산은 위험하다고 가족이 말렸지만, 약에 의존하며 점점 빛을 잃어가는 자신을 다잡을 수 있는 건 산이라 생각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주말에 무리하지 않고 조금씩 다니면서 생기를 찾았다. 나무랑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선하다고 하잖아요, 라며 이야기 끝에 환한 웃음을 짓는다.

설산은 처음이라고 하니 걱정을 덜어준다. 마지막 구간이 조금 가파르지만,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길이 괜찮을 거라며, 좋아하는 곳에 좋아하는 걸 하러 다니는 나를 북돋아준다.

버스를 타고 길이 갈렸다. 적멸보궁을 오르는 길에 다시 마주친 그녀는 활짝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는 인사를 건넸다. 오대산의 찬 공기가 옷깃을 파고 들었지만 마음이 따뜻해졌다.

중대 사자암

설산은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날씨가 풀린 탓에 영하 15도를 대비해 짊어지고 간 옷가지는 짐이 되었다. 네 걸음 걷다 쉬고 세 걸음 걷다 다시 쉬었다. 왕복 3시간 반이면 다녀온다는 구간은 오르는데만 3시간 넘게 걸렸다.

기분도 오르내렸다. 발 밑에서 뽀드득 소리를 내는 눈에 싱긋 웃었다가, 무거운 장비에 땀 범벅이 되며 다 내다버리고 이내 산 아래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도망가는 것도 일이겠구나,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 보일 것 같다고 다독였다. 웃었다 울었다, 나중에는 그마저도 힘이 부쳤다.

눈 덮인 등산로

가까스로 비로봉 정상에 다다랐다. 저 멀리 바다까지 보이는 시원한 날이었다. 가만히 서자 잊고 있던 찬 바람이 손과 발을 얼린다. 무겁게 가져온 보온병에서 아직 온기를 머금은 차로 몸을 데운다.


내려오는 길에 오르는 몇몇에 먼저 말을 걸었다.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라고 했더니 아까부터 그랬다며 힘들게 웃는다. 누군가 잃어버린 렌즈 캡을 보고 내 것인지 물었다. 저도 봤는데 아니더라고요, 하며 타인과 웃음을 나눈다. 무언가를 달성한 이의 여유일까. 그저 정신을 잠깐 놓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낯선 이에 너그러운 내가 낯설다.

산을 따라 고도를 낮추는 해가 속도를 냈다. 1시간에 1대 배차된 버스를 놓치면 귀갓길 열차를 놓친다는 생각에 서둘러 발을 옮겼다. 설산에서는 특히 하산할 때 평소보다 보폭을 절반으로 해 천천히 내려오는 게 중요하다는데, 중요한 건 죄다 반대로 한 셈이다.

버스 바로 앞 평지에서 질퍽한 눈을 밟고 천천히 슬라이딩해 뒤늦게 흙만 잔뜩 묻힌 것 외에는 안전한 산행이었다. 아이젠이며 스틱이니 안전 장비에는 아끼지 않는다는 소비 철학이 빛을 발했다.

돌아와 붙일 수 있는 파스는 죄다 붙이고 끙끙 앓았다. 스스로를 혹사시키는 습관은 언제쯤 버릴 수 있는 걸까. 멍하게 누워있다 겨우 찍어온 사진을 본다.

남은 주말을 덧없이 보내고도 괴로운 마음이 덜한 건 길 위에서 만난 사람에게 얻은 온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무와 꽃을 좋아하는 이들이 선하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지만, 웃음만으로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이를 만날 수 있었던 건 행운이다. 홀로 나선 눈 덮인 산은 결국 고요만을 담은 사진과 따뜻한 느낌으로 기억되고, 망각의 힘으로 다시 설산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비로봉 정상에서

석등 아래 군것질거리. 겨울철 먹이를 찾아 헤매는 산짐승을 위함이 아니었을까.

※ 유랑 노트 (2018년 1월 7일 기준)

KTX 경강선

평창올림픽 덕에 강릉으로 가는 KTX가 2017년 12월 개통됐다. 아직 역사를 갖추고 있는 중이라 깔끔하기만 하다. 주변에 먹을 만한 식당이나 편의 시설은 아직 없고, 대형 버스들을 대비해 주차장과 정차장이 넓다.


오대산 상원사나 월정사로 가기 위해서는 진부(오대산)역에서 내린다. 청량리에서 KTX로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청량리, 상봉, 서울역에서 각기 다른 시간에 출발한다. 진부터미널에서 출발하거나 향하는 몇몇 버스가 역에 정차한다. 버스는 기다리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태우기 때문에 역에 붙어 있는 시간표보다 조금 일찍 밖에서 기다리는 편이 안전하다.

역에서 상원사까지는 버스로 40분 정도 소요. 버스 요금을 지불하기 전에 행선지를 이야기하면 금액을 알려준다. 후불 교통카드로 문제없이 탑승했다.

상원사에서 출발해 역을 들리는 버스를 타면 청량리를 향하는 기차가 출발한 직후 도착한다. 역에서 1시간 반 가량 기다렸다. 장비 정리도 하고, 주섬주섬 허기를 채우다 보니 기차가 왔다.


오대산 비로봉 코스

진부터미널을 출발해 역을 거쳐 가는 버스는 월정사를 거쳐 상원사에 도착한다. 덕분에 해발 1,563m의 비로봉을 800m에서 시작할 수 있다. 정확히는 상원탐방지원센터에서 시작해 중대 사자암이나 상원사, 적멸보궁을 거쳐 비로봉을 향한다.

비로봉은 오대산의 주봉으로, 동대산(1,434m) , 두로봉(1,422m) , 상왕봉(1,491m) , 호령봉(1,561m) 등 다섯 봉우리가 병풍처럼 늘어서 있고 동쪽으로 따로 떨어져 나온 노인봉(1,338m) 아래로는 천하의 절경 소금강이 자리하고 있다, 고 한다. (오대산 국립공원 홈페이지 참고)

탐방코스 중 가장 시간이 짧은 비로봉 코스는 왕복 7km, 왕복 소요시간 3시간 10분에서 30분이라고 되어 있다. 난이도는 쉬움, 보통, 어려움, 매우 어려움이 고루 섞여 있다. ‘지루하지 않고 적당하다’고 아래 그림과 설명해두었다.

출처: 국립공원 – 오대산 국립공원 – 탐방코스 – 비로봉 코스

상암사-중대 사자암-적멸보궁까지는 계단이 나 있어 눈이 온 직후가 아니면 아이젠 착용은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경내를 다니는 데 아이젠 착용은 실례일 수 있겠다. 보통 적멸보궁 아래 본격적인 등산로로 들어서기 직전 아이젠을 착용하는 것 같았다.

혹여 설산 초행인 이들을 위해 (이후 망각할 나 자신을 위해)

제발, 부디, 짐은 가볍게(!!!). 계속 움직여서 땀이 나므로 두꺼운 옷을 계속 입고 다니지는 못하나 사진을 찍느라 서있으면 땀이 마르며 냉기가 엄습한다. 아웃도어용 의류가 없다면 통기성이 좋은 얇고 가벼운 옷 몇 겹을 입고 가벼운 패딩을 걸쳤다 벗었다 하는 편이 좋다. 바지 정도는 방수가 되는 걸로 장만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부디 제발 설산에 겁없이 몸만 오지 말고, 아이젠, 스틱 정도는 갖춰서 오자. 저렴한 아이젠, 스틱은 2만원 대 안팎으로 구입할 수 있다. 나만 다치는 게 아니라 구르면서 다른 이도 다칠 수 있다. 안전은 서로를 위한거다. 미끄러지다시피 내려가는 몇몇 이들에 가슴이 철렁했다.

산을 찾는 이들에게 그저 개인적 소망

삼삼오오 오기도 하고, 홀로 찾기도 하는, 모두의 산이다. 어느 장소나 그렇듯, 내가 즐길 권리가 있는 만큼, 타인의 권리도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담소를 나누며 오르내리는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쌓인 눈 위에서 썰매를 탄다며 구르고 내려가며 산이 떠나가라 웃고 떠드는 한 산악회 때문에 내려오는 길 내내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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