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오르고

불을 가진 자가 되었다

불을 가진 자가 되었다

– 어깨춤이 절로 나는 코펠과 버너 사용기

 

“언어를 제외하고, 인간이 이룬 가장 위대한 발견” – 찰스 다윈, 1871

불 이야기 하나. 아프리카를 떠난 호모 에렉투스가 가진 가장 중요한 진보로 ‘불의 사용’을 꼽는다(호모 에렉투스는 ‘직립한 사람’을 뜻하지만 발견 시기의 문제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전부터 이미 2족 직립 보행을 했다고 한다). 불의 발견 이후로 인류는 사냥한 동물을 구워 먹으면서 뇌 크기가 1200cc로 급격히 늘어났다. 신체적인 변화 외에도 인류는 원하는 곳에 불을 가져와 밤과 추위를 이겨내는, 순응하기만 해야했던 자연을 의도대로 조절하기 시작했다.


불 이야기 둘. 인간을 너무도 사랑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게 불을 빼앗기고 고통 받는 인간들에 불씨를 훔쳐주고는 코카서스의 바위산에 묶여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인다.

Prometheus Brings Fire by Heinrich Friedrich Füger

<출처: Wikipedia>

영하를 오가는 지리산의 아침이었다. 힘겹게 올라 숨을 고르며 대피소 밖 벤치에 걸터앉아 넋 놓고 컵라면을 뜯고 보온병을 풀었다. 아차, 하는 순간 먼 길 함께 온 물의 온기는 허공으로 날아갔다. 허겁지겁 취사장 안으로 들어갔지만, 식은 물이 제 힘으로 끓어오를 일은 만무하다. 라면을 물에 겨우 불려 꾹꾹 씹었다.

얼음장 같은 사과를 먹을 때쯤이었나, 같은 길로 온 것으로 추정되는 한 산행객이 배낭 바닥에 떨어뜨렸다. 웅장한 소리를 낸 배낭에서 코펠과 버너가 등장했다. 그는 끓인 물을 컵라면으로 쏟았다. 다섯 남짓 있던 취사장 안, 불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듯했다. 나는 그곳에서 불을 가지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사는 데 필요한 짐은 더 이상 늘리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산행에 필요한 짐이 자꾸 늘었다. 여럿보다는 소수, 혹은 혼자 다니는 일이 많으니 안전 장비들을 뺄 순 없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시작한 산행이 산을 거닐며 사진을 찍는 정도의 균형을 이루기는 했지만 카메라도 뺄 수 없다. 그러니 하루를 가도 한 짐 가득이라 코펠과 버너는 최후의 보루로 생각했다. 그 날 지리산의 아침, 옷이 없어 산에 못 가냐며 소비욕을 잠시 잠재웠던 잔잔한 마음에 돌멩이가 우수수 떨어졌다.

1달 후 어느 대피소에서 주먹만한 코펠 속 물이 데워지며 기포가 올라오자 호모 에렉투스의 아득한 감동과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새삼스러운 감사,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을 박차고 나간 유레카의 순간, ‘내가 이걸 해냈다’는 승리자의 쾌감이 뒤엉킨 복잡미묘한 감동이 몰려왔다. 흙먼지가 날리던 가파른 등산길은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 것 같았다.


만세 삼창도 했을 기분이었지만 날뛰는 마음을 다잡고 취사장에서 컵라면에 뜨거운 물과 환희를 조용히 부었다. 저들을 손에 넣기 위해 검색과 고민에 들인 시간과 노력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올라가는 입꼬리는 어찌 잡았는데, 어깨가 슬쩍슬쩍 들썩이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니었을 거다. 승리자의 쾌감에 도취되어 불을 가지지 못한 이에 커피 한 잔을 나누어 주었다.

불을 지니는 순간 조심할 것이 참 많지만, 동시에 많은 게 가능해진다. 가능성의 확장은 쾌감마저 미리 당겨온다. 손쉽게 가스렌지를 켜면 나오고 끄면 없어지는 불을 다시 발견한 순간이었고, 산행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당연하고 흔한 것들이 우연한 순간에, 특히 결핍으로 다시금 발견되곤 한다. 160만년 전부터 25만년 전 사이 어느 즈음에 존재했을 그 순간은 2019년 1월 산 위 어느 날 내 인생에도 찾아왔다.

오직 먹기 위해 올랐던 산행, 대망의 (야매) 밀푀유나베.
*계획만 잘하면 라면을 벗어날 수 있다.
준비해간 재료를 넣고 끓이기만 하니 쓰레기도 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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