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단상

같은 거리에서

익숙한 듯 낯선 거리를 따라 한참 걸었다. 멈추지는 않았지만, 목적지를 향해 내달리다시피 한 평소와는 다른 걸음이다. 걷던 방향과는 반대편에 서서 길의 생김새를 살핀다. 내 머리 위를 수없이 스치고 지나갔을 간판들이 새삼스럽다.

사진첩이 펼쳐진다. 나이든 미국 친구와 맥주를 기울이던 곳, 밤을 잊은 뜨거운 인파에 몸을 맡긴 채 이리저리 휩쓸려 다닌 거리, 불판 옆에서 달궈진 젓가락으로 고기를 먹다 화상을 입은 친구에 동정과 폭소를 쏟아냈던 고기집, 몇 십분 기다려 얻어낸 면과 국물을 단 몇 분에 들이켜버린 라멘집. 거리 곳곳이 추억이다. 배를 잡고 웃던 순간도, 사무치게 슬픈 기억도 적당히 희미해졌다. 한 글자 한 글자 빼먹지 않고 어딘가에 저장해두는 컴퓨터와는 달리, 모든 것을 다 기억하지 못하는 건 범인(凡人)에 주어진 축복이다.

추억 속에 자리잡은 사람들에 안부를 묻는다. 지금도 손 닿을 곳에 있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나의 실수로, 사소한 오해로 멀어져 버린 이도 있다. 세상 어디서든 잘 살고만 있어달라 당부한다. 황망하게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에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이다. 같은 거리에 산 자와 죽은 자의 기억이 뒤섞여있다.

떠날 궁리만 하던 나는 무심히도 한 도시에 오래 머물렀다. 드문드문 거닌 거리에도 꺼내볼 추억이 여럿이다. 나날이 새로운 길 모퉁이에 뿌리내린 희미한 기억의 생명력이란. 시간은 그렇게 익숙한 거리가 새삼스러운 오늘을 선물하고는 다시금 하염없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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