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능선에서
공룡능선에서
– 지난 1년을 돌아보며, 그리고 휴식
높은 이상도, 화려한 목표도 없이 무심히 흘러간 나날들이 흐트러진 한 해였다. 그저 시간이 밀어내어 오늘에 이르렀다 생각한 나는 공룡능선에 서서 1년 전 울산바위에 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을 놓치기 싫다는 욕심으로 카메라를 메고 눈 쌓인 산을 올랐다. 이윽고 눈이 녹은 자리를 다양한 초록이 채워 나갈 때, 인간이 만들어낸 ‘초록’이라는 두 글자에 자연을 가두어 두고 그 색이 싫어 아니 가겠노라 공연히 이야기하곤 했다.
극에 달한 스트레스가 무모함을 부추겨 한여름의 설악산을 찾았다. 휴가철 교통체증으로 입산 통제 시간을 겨우 통과했지만 퇴로 없는 길을 장장 9시간 걸어 오후 9시가 되어서야 잠겨있는 오색분소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불빛 하나 없는 산길에서 무서워할 틈조차 사치였던 날이었다.
인스타그램을 자주 들여다보게 된 건 그 즈음이었던 것 같다. 어디를 가볼까, 남의 피드를 기웃거리고, 어디를 다녀왔다는, 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기록을 남겼다. 설악의 하루를 글로 남기고, 초행길에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는 그 댓글에 나를 견주어 본 게 시작이었다.
편집된 단편의 이미지로 자신을 내세우는 플랫폼에는 다양한 이유로 산을 찾은 사람들의 자랑 섞인 모습이 떠다녔다. 어느 산 무슨 종주를 몇 시간에, 라는 글에는 생면부지의 타인으로부터 대단하다는 찬사가 따랐고, 무슨 능선, 무슨 코스를 다녀온 이와 그렇지 않은 이를 두고 산행 수준을 재단하기도 했다. 큰 기대 없이 두리번거리며 고즈넉한 자연에 있는 시간이 좋아진 나는 반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라고 못할쏘냐, 는 생각이 움텄다.
설악산 공룡능선이 그 중 하나였다. 이제 막 산행을 시작한 네가 가기에는, 이라는 말에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자연 앞에 늘 겸허하게 무리하지 않겠다고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정작 가고 싶었던 곳에는 못 가고 여러 국립공원의 까만 색 ‘매우 어려움’ 코스를 에둘러 다녔다. 산행 중 만난 이들과의 이야기가 공룡능선으로 마무리되는 일도 여러 번이었다.
어리석은 자가 들면 깨우침을 얻는다는 지리산이었다. 돌아보면 매순간이 좋았던 산행이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끝난 건 산행 초입에 ‘나는 (네가 못 오는) 여기에 있다’는 누군가의 자랑 때문이었다. 악의가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 메시지로 스스로를 잡고 있던 무언가 툭 끊어졌다.
새해 들어 소박한 몇 가지 계획을 세웠다. 변화무쌍한 매일도 버거운데 굳이 계획으로 스트레스를 더하고 싶지 않았던 몇 년만의 일이다. 산행, 밑줄 아래 대피소 1박, 지리산 종주, 설악산 공룡능선을 적어 내렸다.
한 해를 두고 세운 계획이지만 지리산 종주 후 공룡능선 탐방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다른 것보다도 고립과 조난 가능성 때문에 혼자 산행을, 특히 겨울에는 권장하지 않는 걸 충분히 알고도 남았지만 어느새 나는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3주. 처음은 달을 보고 시작해 달을 보고 끝난 무박 산행, 운좋게 예약한 대피소로 두 번째는 서북능선과 공룡능선, 세 번째는 백담사와 봉정암을 기점으로 하는 내설악, 공룡능선에서 소공원을 빠져나가는 외설악을 걸었다. 극적인 순간은 몇 있었지만 산과 사람의 은혜로 크게 다친 곳 없이 돌아왔다.
성취감과 자신감이 충만해질 줄 알았던 산행의 끝에 허탈감이 맴돌았다. 공룡능선에서 울산바위를 바라보면 지나온 1년이 감개무량할 줄 알았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울산바위에 올라 ‘우우와아아’를 연발하던, 자연의 순간순간을 즐거워하던 나는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경쟁하며 쉼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 대하라는 칸트의 말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는 수단으로 산을 대하게 된 나는 더이상 즐겁지 않았다.
8주만이다. 자발적으로 가지 않겠다 마음 먹고 분주한 도시의 한 켠을 걸었다. 낯설다 이내 그리워진다. 누군가에게, 스스로에게조차 무언가를 증명하지 않고도, 나와 너는 그 자체로 존중 받아 마땅하다. 산은 초심을 잃고 헤매던 어리석은 나에게 그렇게 또 한번 가르침을 준다.
황홀하기만 한 산의 매순간을 쫓기듯 달렸던 어리석음을 반성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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